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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 본문
p286-288
"시칠리아에 다시 오게 될까?"
뱃전에서 아내가 물었다.
"다시 오게 될 거야."
"어떻게 알아?"
"그냥 알 수 있어."
나는 힘주어 말했다. 아내가 뱃머리에 부서지는 흰 물살을 굽어보다 말했다.
"난 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어떤 사람?"
"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어."
아내는 정말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걱정을 해놓아야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특히 여행 같은 거 떠날 때는 더더욱 그랬지. 예약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런데 시칠리아 사람들 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게 뭔데?"
"그냥, 그냥 사는거지. 맛있는 것 먹고 하루종일 얘기하다가 또 맛있는 거 먹고."
"그러다 자고."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야."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속담?"
아내가 짐짓 딴지를 걸어왔다.
"그러니까 여행을 해야 된다는 거야."
"결론이 왜 그래?"
"결론이 어때서?"
우리 말고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잡담이 거센 바닷바람에 풀어지는 사이, 시칠리아섬은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시칠리아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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